아우라의 몰락은 대중에게 도움이 되는가?

아우라의 몰락은 대중에게 도움이 되는가?

나는 오늘 로마에서 전시되는 금속세공품을 컴퓨터 모니터에서 단 몇 번의 클릭으로 볼 수 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카페에서도 인터넷이 연결되는 모든 곳에서 관람할 수 있다. 비행기를 타고 로마까지 가지 않아도 똑같은 금속세공품을 나는 볼 수 있다. 사진으로 복제되어 원하는 사람은 모두 볼 수 있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사는 영화사를 만들어 수십만개를 복사한다. 그리고 원하기만 하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영화를 본다. 그리고 같은 영화를 본 수많은 사람과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지금 세상은 한 진품에 대한 복제가 수없이 일어난다. 그 진품의 현존성과 진품성은 해체된다. 벤야민은 이를 두고 ‘아우라의 몰락’이라 말한다.(벤야민, 202) 또한 아우라의 몰락이 대중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비판하는 보드리야르는 대중문화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중문화는 약인가, 아니면 독인가? 나는 보드리야르의 의견처럼 물신숭배적 자기애, 자신의 몸을 억압하는 공격적 충동, 신체가 자본주의적 목표에 따라 투자되기에 대중문화는 대중에게 독이 된다고 주장한다.

첫째, 보드리야르는 아우라의 몰락으로 가져온 대중운동이 물신숭배적 자기애를 낳는다고 비판한다. 아우라의 몰락은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만 가지는 일회적 현존성과 시간과 공간적 영향을 받는 현존성을 모두 해체한다. 사진으로 저장된 모나리자가 유럽에 있는 진품과는 또 다른 가치를 가진다. 기술복제는 복제품에 수공복제에서 보여줄 수 없는 이미지를 고정해 독자성을 가지게까지 한다.(벤야민, 201) 예를 들면 우리는 수공예품을 정교하게 컴퓨터 스캔하여 더 정확하고 예리한 같은 공예품을 내놓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A라는 진품과 아주 흡사하지만 다른 특성을 갖는 A’, A”… 가 나타난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에 들어 광고, 모드, 대중문화 등 모든 곳에 신체의 형상이 범람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다. 나의 신체가 이런 대중운동과 소비/생산의 구조에 휩쓸려 자본과 물신으로 취급한다.(보드리야르, 190) 물신숭배에 빠진 육체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 속의 배우와 같은 가치를 자신의 신체에 채워주려는 자기애에 빠진다. 우리는 자신의 신체를 관리하여 사회에서 상품으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할 뿐이다.

둘째, 보드리야르는 영화를 통해 보여지는 배우들의 완벽에 가까운 몸매가 자신의 몸을 억압하는 공격적 충동을 나타나게 한다고 비판한다. 영화에서는 정지된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는 촬영기법과 저 멀리서 무림고수들의 대련을 확대하여 칼날의 부서짐까지 보여주는 촬영기법이 있다. 영화는 더 정확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상황을 재현하며 회화나 무대보다 사람과 배경을 훨씬 용이하게 분리할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영화는 시각과 청각의 세계에 지각의 심화를 가져다준다.(벤야민,222) 그리고 확대촬영과 고속촬영으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지나치는 부분까지 인식하게 해준다.(벤야민, 223) 우리는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을 배경에서 분리해서 분석할 수 있다. 분석을 통해 우리는 아름다워져야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세운다. 그리고 몸의 선을 아름답게 유지하고 싶다는 강박관념이 정신을 지배한다. 결국에는 몸의 날씬한 선을 만들어 인정받고 싶은 욕구충족적 배려와 몸의 선을 만들기 위한 고통스러운 운동과 다이어트를 통해 자기 몸에 대한 공격 충동을 보인다.(보드리야르, 214) 공격 충동은 절식요법(다이어트)의 고행 속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절식요법의 목적은 영화속의 등장인물과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절식요법은 자신의 무가치성을 반대로 증명해 준다.

셋째, 보드리야르는 다다이즘이라는 새로운 예술형식의 출현은 신체의 신성함을 박탈하고 세속화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벤야민은 아우라의 몰락 시기에 생겨난 새로운 예술형식에 주목한다. 모든 사회적·예술적 전통을 부정하고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표방한 다다이즘이었다. 마르셀 뒤샹의 1913년 작품인 “자전거바퀴”가 있다. 이 미술작품은 각각의 구성에서 분리, 재조합되어 자전거 바퀴나 의자의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자전거 바퀴는 더 이상 본래 바퀴의 역할을 하지 못하며, 의자 또한 그 위에 앉을 수 없다. 본래의 기능성을 상실한 구성품이 본래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다다이스트들은 작품의 상품적 가치보다는 작품의 무가치성을 더 중시하였다.(벤야민, 225) 다다이스트들의 작품이 도달하려는 것이 작품의 아우라를 파괴하고 생산수단들을 빌려 작품에 복제의 낙인을 찍는 것이었다.(벤야민, 225) 보드리야르는 다다이즘을 18세기 이후 철학이 전통적인 신앙근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오랜기간에 걸친 신성함의 박탈과 세속화의 흐름은 육체가 해방되게 하였다. 그러나 해방된 육체라는 명제에 속아서는 안된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종교가 민중에게 요구했던 영혼의 이데올로기가 더욱 육체의 상품가치만 강조한 기능적인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었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보드리야르,203)

하지만, 누가 전통적 신체 의미의 해체로 인해 자기도취적 자기애를 갖지 않았는가?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전통적인 신학과 철학속의 폐쇄적인 권위를 뒤흔들고 위기에 빠뜨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기술복제품들을 대중에게 공개한다.(벤야민,201) 다윗과 비너스처럼 완벽한 육체의 예들을 모두에게 공개함으로써 자신을 조금 더 완벽하게 가꾸게 하는 자기애를 실현할 근거를 마련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중세이후 복제가 금지되었던 성경을 각국의 언어로 복제 보급하여 대중에게 신앙을 전파하어 서로 다른 성경해석으로 교회의 다양성을 가지게 하였다. 또한 영화와 사진의 발명으로 시각에 무의식적으로 스쳐지나던 것들을 우리에게 강조하여 독자성을 느낀다. 보드리야르에게는 대중문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요구는 절대적이며 종교적이라고도 할 만한 지상명령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지상명령은 자본의 형태로 나타난다. 자본의 형태로서의 육체는 하나의 관념이 아닌 교환가치에 불과할 따름이다. 교환가치로 전락한 육체는 제멋대로 추상화되어 기호의 교환대상이 될 뿐이다.(보드리야르,196)

오늘의 대중운동은 나에게 자신의 육체를 사랑한다면 사진과 영화 속의 멋진 배우들처럼 몸의 선을 다듬으라고 한다. 또한 그런 기준을 정교한 기술복제를 통해 전 세계에 요구한다. 사람들을 자신을 위한다며 동조한다. 그러나 누가 결국 대중문화가 가용하는 육체의 한 가지 기준에 잡혀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나는 보드리야르의 의견처럼 물신숭배적 자기애, 자신의 몸을 억압하는 공격적 충동, 신체가 자본주의적 목표에 따라 투자되기에 대중문화는 대중에게 독이 된다고 주장한다.

참고자료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옮김, 1983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이상률 옮김, 문예,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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