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적 귀족들의 사회 : 귀족사회 지향하는 대한민국에 대한 단상

현재 한국사회의 많은 병리적 현상 가운데 가장 중심에 위치하는 것은 양극화문제이다. 대통령 선거나 지방선거 때마다 선거입후보자들이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양극화 해소용 백신을 공약으로 내걸지만 아직까지 이런 공약이 별 효과는 없는 것 같다. 그만큼 꽤 오랜 시간 동안 우리사회를 괴롭힌 문제다. 양극화란, 말 그대로 ‘자본’의 편향 문제이다. 자본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소수의 풍족함과 대다수의 빈곤으로 양분되고 거기에 따른 대다수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사회 분위기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지역적 관점에서 서울은 양극화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자본가들의 주 밀집지역인 강남권과 강남을 제외한 비주류 지역인 非강남권으로 나누게 된다. 사회통념상 동일한 행정권 아래 이렇게 양분된 도시모델을 찾기는 아마 힘들 것이다. 한마디로 두 개의 서울이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서울에 모여 사는 서울시민들의 정서에 ‘지방’이라는 말은 이미 서울을 제외한 비주류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 된지 오래지만 이제는 강남을 ‘서울 대표시민구’(서초?강남?송파)라는 호칭으로, 강북은 ‘강북 지방’으로 서울의 지역성을 다시 정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남들 보다 상대적으로 월등하거나 풍족한 자본의 여유를 가지고 자신들의 구역을 특정화시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이 선망하는 귀족주의이고 구별짓기 행위이다.

최근 언론매체의 보도에 간간히 귀족들의 구별짓기가 구체적으로 목격된다. 서울 남산 3호터널 인근의 스테이트타워 펜트하우스에는 영국이나 홍콩 등지에서 운영되는 고급 비즈니스 클럽을 표방한 이른바 ‘젠틀맨스클럽’이 성행중이다. 사회 상위 0.01% 고객을 대상으로 연회비가 1천만 원이 넘는다. IMF이후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이 본격화되면서 오히려 귀족마케팅으로 VIP고객을 획득한 백화점, 은행, 호텔, 명품 숍 등 소비중심 서비스업체들은 쏠쏠한 재미를 봤고 고급 비즈니스 클럽은 귀족마케팅의 정점에 와있는 느낌이다. 서비스업체 뿐 아니라 문화관련 업계에도 이런 마케팅은 존재한다. 고급화로 차별화된 문화공연을 제공하는 강남구 삼성동의 마리아칼라스홀은 대기업관련 부유층이나 의사, 약사, 법조인등의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을 주요 고객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곳 역시 VIP들의 사교모임 장소로 활용되며 대관 요청 시 내부 심사를 통해 대관 요청자나 요청단체의 권위나 지명도가 자격요건에 맞지 않을 경우 대관이 불가능하다. 이런 예에서 우리 사회의 새로운 상류층들은 과거의 경제적 자본에 의존하던 방식과는 다르게 문화자본과 사회자본 소유의 문제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또 자본주의에서 문화산업의 소비패턴이 어떻게 상류층과 일반계층을 차별하는지도 구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앞에서 언급한 강남의 중산층 아파트 주거지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아파트 부녀회의 가격 담합, 집값 올리기 등은 부의 재창출 및 외부적 응집력의 강화를 통해 외부인들이 강남권에 진입하는 것을 원천 차단한다. 강남권 주택 지구에서 살다가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오기 힘들다는 말이 그것이다. 말을 만들어보자면 ‘一落不入’이라고나 할까? 구별짓기는 이뿐만 아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좋은 상품’을 구분하는 기준의 차이는 좋은 집안끼리의 혼인을 장려한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집안이나 강남지역에서 서울대 진학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사실을 두고 보면 한국사회에서 서울대 출신의 사회적 장악력을 가늠할 수 있고 대대로 그 출신성분을 유지하려는 욕구인 학벌지상주의는 한국에서 강력한 신분구조를 만들어내는 주요 요인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중심주의 신화를 지향하는 사고와 행동, 그리고 이에 말미암은 구성원들의 갈등 유발현상은 단지 유력 지역구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혐의를 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비주류 지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러한 사회적 병폐는 한결같이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도 언젠가는 상류지역?계층에 편입하고 진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신분상승의 꿈이다. 앞서의 1차적 문제는 신흥귀족들이 배타적인 현 상황을 지속시키고 세습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점이지만 그들의 노력에 중산층은 물론 현 정권에서 확실히 규정한 서민층까지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꽤 지난일이지만 2008년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민이미지의 진보신당 노회찬이 귀족이미지의 한나라당 홍정욱에게 노원구에서 패배한 것과, 같은 시기 도봉구에서 민주당의 김근태가 보수우파 정치인 신지호에게 지역구를 내준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물론 ‘우리지역도 한번 잘살아 볼까(?)’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이 너무 단도직입적이고 무엇인가 진지한 사유와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누구나 사회적으로 부유한 삶을 누리려는 욕망은 있고 존중되어야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계속해서 강자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이런 비현실적인 결과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대선이나 지방선거만 되면 가까운 동네나 시장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보통 이런 문제를 체제의 문제로 보거나 도덕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대한민국의 근대와 현대의 역사적 접점이 정확히 맞물리지 못한 상황에서 시민사회를 경험할 여유 없이 엉겁결에 수용하게 된 민주주의제도와 자본주의체제를 아직까지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대한민국 사회가 잘못 전수된 전통적 정치체제와 사회의 통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근대 국민국가 건설운동이 한국전쟁으로 무산되고 전후 이데올로기적 사회구조가 지속되면서 미군정의 지배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유산이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물론 그 이후 경자유전?농자본위(耕者有田?農者本位)의 원칙 아래 토지개혁이 진행되었고 봉건적 신분질서를 실질적으로 극복하는 듯 했지만 이승만 이후 반공이데올로기의 대두는 사회운동을 통한 평등질서를 자리매김하는데 걸림돌이었다. 전제군주제-일제강점기-미군정-이승만 정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지배체제는 대다수의 국민들을 절대 권력자가 백성들에게 내려주는 은혜로운 베풂의 수혜자 입장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후 국민이 정치상황에 참여하지 못했던 군부독재 시대의 성과주의, 성장위주, 업적정치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우리의 정치사 현실에 그 잔상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 국민은 자본의 공세에 대해 반성적, 비판적으로 대처할 힘이 부족했고 IMF이후 신자유주의 국면을 맞이하면서 오로지 자본을 위한 나라가 되었다.

현재 우리사회가 누구나 귀족적인 신분상승의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연유에 있어서 문화적인 면에서 조선시대 이른바 지배귀족계층의 주류문화였던 양반(兩班)문화에 대한 관념도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원래 조선 초기에 사회신분은 양인(良人)신분과 천인(賤人)신분이 법제적 기준이었지만 이후 양반과 非양반의 신분구분이 더 중요시 되었고 양반?중인?양인?천인의 네 신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양반이란 말은 원래 관료체계에서 비롯된 말이고 양반은 사적 토지를 소유한 지배신분계층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일반 양인들이 과거에 응시하는데 어떠한 제약도 명시하지 않았지만 일반 양인들의 경제력은 양반들의 경제력과 그에 따른 교육환경을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은 지식엘리트 집단인 양반지식인층에 의해 통치되었고 조선왕조 500년은 이런 보수적 유교정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양반계층의 신분적 우월성은 혈연에 의한 특권과 차별적 대우가 세습되는 인간집단을 의미한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고 자기와 자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신분이 적용되는 외연을 끊임없이 확대한다. 양반이란 신분은 이미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통한 세력의 확대는 조선시대 상위층의 구별짓기 방법이었다. 1894년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양반이라는 신분은 없어졌지만 긴 시간동안 우리의 관념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신분제의 기억은 그대로 우리의 문화의식 속 심층구조에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양반이란 개념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니게 되었지만 과거 권력에 대한 독점권을 포섭하기 위한 방법과 그 형태는 현대 신흥 귀족들과 그 귀족사회를 꿈꾸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식과 별반 다름없다.

다만 사회체제가 다를 뿐 구조적인 문제는 동일하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조선후기 지배층의 무능력과 벌열(閥閱)숭상을 비판한 내용과 마찬가지로 현재 신흥 귀족세력은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가는 이를 방치한다. 상대적으로 생존권과 행복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많은 중소계층에게 무한경쟁의 논리를 강요하면서 희망이 있는 것처럼 쇼를 하고 있다. 그러나 희망은 찾기 힘들다. 노력의 보상이라고 하는 명문대 입학은 경제적 지원이 없으면 실현하기 어렵다. 신분전환의 유일한 기재였던 교육은 자본에 포섭된 지 오래이다. 재벌가와 사회지배층의 지배력 확대에 대한 계속되는 합리화는 우리의 성찰을 무디게 만들고 거기에 동조하게 한다. 무의식으로 쫒아 가게 만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조장한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나 세습적 신분제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얼기설기 혼란스러웠던 우리의 근현대는 성찰을 통한 과거 극복에 실패했고 그 폐단이 고스란히 현재화된 문제점이 있다.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의식의 개진이 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자화상은 엄마의 젖가슴만 인식한 채 성인이 되어서도 부분으로 전체를 이해하는 페티시즘을 안고 살아가는 형상이다. 자신의 생존과 자본의 연결을 인간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이 그 중심에 서있어야 안정된다. 오늘 우리가 항상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사실 외부에서부터 왔다기보다는 내부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시대적인 아픔도 분명 존재하고 억울한 면도 있겠지만 현실의 시대착오적 발상은 결국 우리 안에서 돌파해야 한다. 이미 사회의 중심 권력의 자리는 선점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 중심화의 신화는 서로가 실현 불가능한 사안임을 인식해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중심의 배타성은 심각해질 것이다. 작은 부분부터 사회적 공동체의식을 확립시켜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자생적인 공동체문화의 태동이 중요하다. 공동체적 국가가 아닌 지배력에 의존하는 국가체제가 상존하는 한 고대 동양의 정치철학을 대변하는『서경(書經)』의 “한쪽과 한 당파에 치우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탕탕(蕩蕩:사악함이 없이 관대하고 큼)하며, 한 당파와 한쪽에 치우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평평(平平)하며…(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라는 공평의 통치철학에도 근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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